2008년 07월 10일
초기 엔젤하트가 망한 이유
* 글을 써놓고 보니 예전 기획사와 한마디 얘기도 없이 이런 글을 나부린다는게 참 안 좋은 일인 것 같아서 일부 내용은 편집했으며, 제목도 [엔젤하트가 망한 이유]였는데, 지금 엔젤하트는 아직 공식 해체를 한 적이 없으니 차라리 초기 엔젤하트가 망한 이유라고 바꿔놓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서 제목도 수정 하였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엔젤하트는 저랑은 전혀 상관이 없고, 이 글과도 상관이 없고, 향후의 기획 및 진행 방향역시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
오늘 낮에 킬아님과 채팅질을 하다가 엔젤하트 하면서 얼마 벌었냐, 그럴꺼 왜했냐...는 얘기를 하길래, 로또를 할때 되니까 사는거냐? 될지도 모르니까 사는거지! 등의 얘기를 하다가 정리 되었습니다. 정리하고 뭐고 할꺼 없이, 사실은 노래가 별로였고 인기가 없으니까 망한거지 뭘 또 거기다가 가따 붙이냐고 하신다면 할말은 없습니다만, 사실 엔젤하트의 기획 자체는 굉장히 획기적인 기획이었으며, 거기에 "연예인"이 되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던 세라알군의 붕 뜬 마음이 결합되어 시작 된거라 봐도 무방 합니다.
제가 엔젤하트에 들어가게 된건 98년도 입니다. 제가 기타를 들고 지하철을 탔을때가 있었는데, 기타를 선반위에 올려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눈을 잠깐 떳는데, 제가 내려야 할 곳에 이미 지하철이 도착해 있던거죠. 기타 내버려두고 걍 내렸습니다. 한 3초쯤 지났을까? 아씨발 내 기타! 하면서뒤돌아보니 지하철은 떠나긴 했는데, 소피아님(현재 카이저)이 제 기타를 들고 따라내리신 겁니다. 그러면서 인연이 시작 된거죠.

아까도 얘기 했듯 엔젤하트의 기획의도는 당시 매우 획기적인 기획 이었습니다. 일본 문화가 우리나라에 개방 되던때가 98년 입니다. 그때 트라이포트 락페스티발(현재 펜타포트 락페스티발)에 처음으로 일본 락밴드가 와서 공연 한다며 매드캡슐마켓이 공연을 하고 그러던 때입니다.
지금 2008년 현재, 나이가 25살에서 35살 사이에 있으신 분들께선 스스로 고등학교 당시 "엑스재팬"이라는 일본 밴드가 얼마나 큰 인기를 가지고 폐쇄적으로 전파되었는지 알고 계실껍니다. 사실 한국에서 비쥬얼락이 퍼지게 된 건 엑스재팬의 영향이 크죠. 그런데 정식 수입상이 없다보니, 복사에 복사를 거듭 해서 앨범을 수집 하고, 심지어는 악보도 복사해서 팔고 뭐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스재팬은 핫뮤직이나 GMV 같은 잡지에 광고를 내어 모이던 팬클럽과, 음악감상실이라고 불리우던 장소들과, 01410에 접속하여 모일 수 있는 피씨통신의 동호회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96~97년쯤 해서는 엑스재팬 뿐만 아니라 라르끄엥씨에루, 마리스미쟈 하여튼 수많은 일본 음악들이 제한된 인원 안에서 터지기 직전까지 인기가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98년도에 일본문화가 개방 된다고 하니, 개방 되기전에도 이렇게 엄청난 소비자가 있는데, 개방만 되었다 하면 일본 문화가 한국에 급속도로 퍼질꺼라는 예측을 했던 겁니다. 물론 이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지만, 일본 문화의 개방 전에도 저렇게 오타쿠들 사이에 비졀락이 인기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추측해낸 결과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엔 투자자가 투자를 하느냐 마느냐에서 충분히 투자를 마음 먹을 수 있을 상황이 되었던거죠.

결국, 모든 대중을 아우르는 밴드를 만들어 조낸 평범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비쥬얼락의 근본까지 따라가 철저히 비쥬얼락의 시초부터 연주하는 밴드가 되기로 했었습니다. 앨범 역시 만들지 않고, 싱글로 발매한뒤 여러개의 싱글이 모이면 그때 그 각각의 싱글을 앨범에 꽂아넣는다는 진짜 50년대의 정통 음악 발표 스타일까지 따라가려고 해서 엔젤하트는 싱글 씨디도 일반 싸이즈가 아닌 도넛츠 싱글씨디까지 발매합니다(그 당시 일본에서는 조낸 평범한 방법이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죠). 게다가 그 씨디에는 멤버 한명의 스티커까지 들어있었습니다. 오타쿠들의 주머니를 열게 할 기획 이었는데, 멤버 4명의 스티커를 모으려면 싱글씨디를 4개나 사야 했을꺼고, 중복 스티커가 나오면 그걸 서로 교환 하기 위해 커뮤니티가 자동적으로 발생될꺼라는 기획 의도였습니다.
게다가 일본 뮤지션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마치 린킨파크가 피아를 데리고 투어를 돌듯이, 분명 한국 투어를 오게되면 같이 하게 될 파트너가 필요 했을꺼고,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만한 일본의 비졀락 밴드가 들어오기만 하면, 오프닝 및 행사진행 파트너로 엔젤하트가 선택 될 것은 분명할 것 같았고, 그것을 또 나름의 홍보 수단으로써 활용 하겠다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던 겁니다.
이런 나름대로의 시장 조사가 있었고, 마케팅을 펼칠 타겟도 정확 했었죠. 비쥬얼락을 좋아하셨던 분들께선 아마 아직도 엔젤하트 라는 밴드가 99년쯤 해서 있었더라는걸 기억 하실 껍니다. 게다가 각 인터넷 피씨통신업체(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등)에 아이디를 개통해서 수시로 비쥬얼계 동향을 체크했었으며, 나중에 천리안에는 팬클럽까지 창단 되었었죠.
하지만 그렇게 타겟을 정확하게 만들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실제 앨범이 발표되고 나서 엔젤하트는 촌스럽기 그지 없다는 평가가 우선이었으며, 싱글 씨디라는것이 뭔지도 몰라서 사람들이 허둥지둥 했었고, 한두곡 들어있는게 꼴랑 오천원씩이나 했으니 뭐 말 다했죠.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비쥬얼 락음악의 오타쿠 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엔젤하트를 "드디어 한국에 비쥬얼락을 꽃 피워 주었구나!" 라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저색히들 웬지 나보다 더 오타쿠?"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뮤지션과 팬의 관계가 아닌, [내가 더 많이 알아!] 범주에 끼워져 있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 해버렸습니다.
엑스재팬이 한국에 들어와서 엔젤하트를 먼저 찾는 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웬 낙하산 새끼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공적을 가로채는거임? 이거 뭥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거죠. 정확하게 말해서 시샘과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릴 수 있는 아이돌이 탄생하기전에 미리 싹을 잘라버려야겠다는 그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된 겁니다. 마케팅 타겟으로 삼았던 그들에게서요.
이거 웬지 오타쿠를 비난하는거처럼 들리는데, 그런 의도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첫번째 싱글 발매 후 우리의 마케팅 포인트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싱글을 계속해서 여러개 발표해서 나중에 앨범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전면수정해서 부랴부랴 1집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노래 자체는 대중음악이 아니라 정통 비쥬얼에 더 가깝게 만들려고 했었고 (심지어는 엥카 풍의 노래까지도 나옵니다) 완성도는 높여야 겠는데 시간은 없어서 곡수가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비쥬얼락을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엠넷과 KM과 한국 엠티뷔같은 케이블 부터 공중파 방송에도 무한정 홍보를 시작합니다. 공중파 방송의 순위 프로그램에는 50위권 정도 챠트되기도 했었고, 특히 엠넷에서는 핫클립이라는 광고매체를 이용해서 00년 3월 한달간 엠넷만 틀었다 하면 엔젤하트가 나오는 기현상도 발생 했었죠. 하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엄청나게 뿌린 홍보비는 수입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휘청거리는 상황에 저는 군대에 입대하라는 영장까지 나오게 됩니다.

물론 저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쓴거라곤, 기획사 와따가따하며 연습하는 차비정도 들었겠죠. 하지만 3년동안 그렇게 열정을 바쳐 했던 밴드가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뭔가 허무하기도 하고, 군대 영장도 나오고, 이래저래 상황이 악화되었던 터라, 탈퇴하고 싶어졌습니다. 전 정말 성공 하고 싶었습니다. 엑스재팬이 길르던 루나씨란 밴드가 있듯, 제가 나중에 솔로로 독립하게되면 세라씨 라는 밴드를 만들어서 기타리스트로써 날려보고 싶었고, 정통 하드락 계열의 기타 플레이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주얼 락음악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던터라, 임펠리테리밴드, 잉베이 밴드, 새트리아니밴드 같이 기타리스트 밴드로써 나중에 성공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엔젤하트는 그 발판이 되길 바랬었구요.
하지만 누구나 마찬가지이듯, 탈퇴하기엔 계약이라는 장벽이 존재 했습니다. 탈퇴하고싶다고 말씀 드리는거 자체가 굉장히 곤란했던 상황이었죠. 게다가 매니저형아도 생업 다 때려치고 예전에 음악하던 형아라서 나를 되게 잘 이해해 주었었고 하여튼 여러가지로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기획사에서 아무런 상황 만들지 않고 계약을 종료 시켜주어서 아직까지도 감사할 따름 입니다.
그 뒤로 2004년인가 해서 엔젤하트가 다시 등장 했습니다. 그때부턴 제가 잘 모릅니다. 아는사람은 그당시 소피아 라고 불리우던 카이저님밖에 모르겠고, 나머지 멤버들도 전원 바뀐 것 같더군요. 기획사의 사람들도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근데 네이버에서 SERRA를 검색하면 그 2004년에 나온 앨범이 제 이름으로 잡혀서 검색이 되더군요 ㅎㅎ
아무튼 엔젤하트 초기 데뷔가 망했던 이유는 대략 이렇습니다. 기획 의도 자체는 매우 좋았지만, 마케팅 타겟에대한 잘못된 선정, 번복, 멤버들 초심의 분실, 투자금 미상환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였죠. 참 안타깝기도 합니다. 에휴..
Angel heart - Desire love (트랙백)
오늘 낮에 킬아님과 채팅질을 하다가 엔젤하트 하면서 얼마 벌었냐, 그럴꺼 왜했냐...는 얘기를 하길래, 로또를 할때 되니까 사는거냐? 될지도 모르니까 사는거지! 등의 얘기를 하다가 정리 되었습니다. 정리하고 뭐고 할꺼 없이, 사실은 노래가 별로였고 인기가 없으니까 망한거지 뭘 또 거기다가 가따 붙이냐고 하신다면 할말은 없습니다만, 사실 엔젤하트의 기획 자체는 굉장히 획기적인 기획이었으며, 거기에 "연예인"이 되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던 세라알군의 붕 뜬 마음이 결합되어 시작 된거라 봐도 무방 합니다.
제가 엔젤하트에 들어가게 된건 98년도 입니다. 제가 기타를 들고 지하철을 탔을때가 있었는데, 기타를 선반위에 올려놓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눈을 잠깐 떳는데, 제가 내려야 할 곳에 이미 지하철이 도착해 있던거죠. 기타 내버려두고 걍 내렸습니다. 한 3초쯤 지났을까? 아씨발 내 기타! 하면서뒤돌아보니 지하철은 떠나긴 했는데, 소피아님(현재 카이저)이 제 기타를 들고 따라내리신 겁니다. 그러면서 인연이 시작 된거죠.

<그 당시의 나 ㅋㅋㅋ>
아까도 얘기 했듯 엔젤하트의 기획의도는 당시 매우 획기적인 기획 이었습니다. 일본 문화가 우리나라에 개방 되던때가 98년 입니다. 그때 트라이포트 락페스티발(현재 펜타포트 락페스티발)에 처음으로 일본 락밴드가 와서 공연 한다며 매드캡슐마켓이 공연을 하고 그러던 때입니다.
지금 2008년 현재, 나이가 25살에서 35살 사이에 있으신 분들께선 스스로 고등학교 당시 "엑스재팬"이라는 일본 밴드가 얼마나 큰 인기를 가지고 폐쇄적으로 전파되었는지 알고 계실껍니다. 사실 한국에서 비쥬얼락이 퍼지게 된 건 엑스재팬의 영향이 크죠. 그런데 정식 수입상이 없다보니, 복사에 복사를 거듭 해서 앨범을 수집 하고, 심지어는 악보도 복사해서 팔고 뭐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스재팬은 핫뮤직이나 GMV 같은 잡지에 광고를 내어 모이던 팬클럽과, 음악감상실이라고 불리우던 장소들과, 01410에 접속하여 모일 수 있는 피씨통신의 동호회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96~97년쯤 해서는 엑스재팬 뿐만 아니라 라르끄엥씨에루, 마리스미쟈 하여튼 수많은 일본 음악들이 제한된 인원 안에서 터지기 직전까지 인기가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98년도에 일본문화가 개방 된다고 하니, 개방 되기전에도 이렇게 엄청난 소비자가 있는데, 개방만 되었다 하면 일본 문화가 한국에 급속도로 퍼질꺼라는 예측을 했던 겁니다. 물론 이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지만, 일본 문화의 개방 전에도 저렇게 오타쿠들 사이에 비졀락이 인기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추측해낸 결과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엔 투자자가 투자를 하느냐 마느냐에서 충분히 투자를 마음 먹을 수 있을 상황이 되었던거죠.

< 1집 앨범과(왼쪽), 첫번째 싱글 도너츠 씨디(오른쪽) >
결국, 모든 대중을 아우르는 밴드를 만들어 조낸 평범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비쥬얼락의 근본까지 따라가 철저히 비쥬얼락의 시초부터 연주하는 밴드가 되기로 했었습니다. 앨범 역시 만들지 않고, 싱글로 발매한뒤 여러개의 싱글이 모이면 그때 그 각각의 싱글을 앨범에 꽂아넣는다는 진짜 50년대의 정통 음악 발표 스타일까지 따라가려고 해서 엔젤하트는 싱글 씨디도 일반 싸이즈가 아닌 도넛츠 싱글씨디까지 발매합니다(그 당시 일본에서는 조낸 평범한 방법이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죠). 게다가 그 씨디에는 멤버 한명의 스티커까지 들어있었습니다. 오타쿠들의 주머니를 열게 할 기획 이었는데, 멤버 4명의 스티커를 모으려면 싱글씨디를 4개나 사야 했을꺼고, 중복 스티커가 나오면 그걸 서로 교환 하기 위해 커뮤니티가 자동적으로 발생될꺼라는 기획 의도였습니다.
게다가 일본 뮤지션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마치 린킨파크가 피아를 데리고 투어를 돌듯이, 분명 한국 투어를 오게되면 같이 하게 될 파트너가 필요 했을꺼고,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만한 일본의 비졀락 밴드가 들어오기만 하면, 오프닝 및 행사진행 파트너로 엔젤하트가 선택 될 것은 분명할 것 같았고, 그것을 또 나름의 홍보 수단으로써 활용 하겠다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던 겁니다.
이런 나름대로의 시장 조사가 있었고, 마케팅을 펼칠 타겟도 정확 했었죠. 비쥬얼락을 좋아하셨던 분들께선 아마 아직도 엔젤하트 라는 밴드가 99년쯤 해서 있었더라는걸 기억 하실 껍니다. 게다가 각 인터넷 피씨통신업체(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유니텔 등)에 아이디를 개통해서 수시로 비쥬얼계 동향을 체크했었으며, 나중에 천리안에는 팬클럽까지 창단 되었었죠.
하지만 그렇게 타겟을 정확하게 만들었던 것이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실제 앨범이 발표되고 나서 엔젤하트는 촌스럽기 그지 없다는 평가가 우선이었으며, 싱글 씨디라는것이 뭔지도 몰라서 사람들이 허둥지둥 했었고, 한두곡 들어있는게 꼴랑 오천원씩이나 했으니 뭐 말 다했죠.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비쥬얼 락음악의 오타쿠 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엔젤하트를 "드디어 한국에 비쥬얼락을 꽃 피워 주었구나!" 라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저색히들 웬지 나보다 더 오타쿠?"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뮤지션과 팬의 관계가 아닌, [내가 더 많이 알아!] 범주에 끼워져 있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 해버렸습니다.
엑스재팬이 한국에 들어와서 엔젤하트를 먼저 찾는 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웬 낙하산 새끼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의 공적을 가로채는거임? 이거 뭥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거죠. 정확하게 말해서 시샘과 질투의 대상이 되어버릴 수 있는 아이돌이 탄생하기전에 미리 싹을 잘라버려야겠다는 그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된 겁니다. 마케팅 타겟으로 삼았던 그들에게서요.
이거 웬지 오타쿠를 비난하는거처럼 들리는데, 그런 의도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니까 오해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첫번째 싱글 발매 후 우리의 마케팅 포인트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싱글을 계속해서 여러개 발표해서 나중에 앨범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전면수정해서 부랴부랴 1집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노래 자체는 대중음악이 아니라 정통 비쥬얼에 더 가깝게 만들려고 했었고 (심지어는 엥카 풍의 노래까지도 나옵니다) 완성도는 높여야 겠는데 시간은 없어서 곡수가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비쥬얼락을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엠넷과 KM과 한국 엠티뷔같은 케이블 부터 공중파 방송에도 무한정 홍보를 시작합니다. 공중파 방송의 순위 프로그램에는 50위권 정도 챠트되기도 했었고, 특히 엠넷에서는 핫클립이라는 광고매체를 이용해서 00년 3월 한달간 엠넷만 틀었다 하면 엔젤하트가 나오는 기현상도 발생 했었죠. 하지만 그게 다였습니다. 엄청나게 뿌린 홍보비는 수입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휘청거리는 상황에 저는 군대에 입대하라는 영장까지 나오게 됩니다.

<스포츠 신문 1면 기사에도 나왔었죠 ㅋㅋㅋ>
물론 저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쓴거라곤, 기획사 와따가따하며 연습하는 차비정도 들었겠죠. 하지만 3년동안 그렇게 열정을 바쳐 했던 밴드가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뭔가 허무하기도 하고, 군대 영장도 나오고, 이래저래 상황이 악화되었던 터라, 탈퇴하고 싶어졌습니다. 전 정말 성공 하고 싶었습니다. 엑스재팬이 길르던 루나씨란 밴드가 있듯, 제가 나중에 솔로로 독립하게되면 세라씨 라는 밴드를 만들어서 기타리스트로써 날려보고 싶었고, 정통 하드락 계열의 기타 플레이스타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주얼 락음악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던터라, 임펠리테리밴드, 잉베이 밴드, 새트리아니밴드 같이 기타리스트 밴드로써 나중에 성공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엔젤하트는 그 발판이 되길 바랬었구요.
하지만 누구나 마찬가지이듯, 탈퇴하기엔 계약이라는 장벽이 존재 했습니다. 탈퇴하고싶다고 말씀 드리는거 자체가 굉장히 곤란했던 상황이었죠. 게다가 매니저형아도 생업 다 때려치고 예전에 음악하던 형아라서 나를 되게 잘 이해해 주었었고 하여튼 여러가지로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기획사에서 아무런 상황 만들지 않고 계약을 종료 시켜주어서 아직까지도 감사할 따름 입니다.
그 뒤로 2004년인가 해서 엔젤하트가 다시 등장 했습니다. 그때부턴 제가 잘 모릅니다. 아는사람은 그당시 소피아 라고 불리우던 카이저님밖에 모르겠고, 나머지 멤버들도 전원 바뀐 것 같더군요. 기획사의 사람들도 바뀌었는지 안 바뀌었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근데 네이버에서 SERRA를 검색하면 그 2004년에 나온 앨범이 제 이름으로 잡혀서 검색이 되더군요 ㅎㅎ
아무튼 엔젤하트 초기 데뷔가 망했던 이유는 대략 이렇습니다. 기획 의도 자체는 매우 좋았지만, 마케팅 타겟에대한 잘못된 선정, 번복, 멤버들 초심의 분실, 투자금 미상환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였죠. 참 안타깝기도 합니다. 에휴..
Angel heart - Desire love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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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7/10 22:44 | Serra | 트랙백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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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니가 말한 이유들 외에도 전반적으로 그런 문화를 받아들이기엔 우리나라가 너무 폐쇄적이지 않나 싶다. 웬만하면 그때에는 그랬다..라고 하고 싶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달라보이지 않네..
Vicious // 제 친구가 멤버였습니다. 근데 그 친구가 필리핀가서 연락두절.. ㅋㅋㅋ
세라 // 생각해보니 나 군대갈 때던가 그 때보고 너 필리핀가고 한 7-8년 못보고 살았던 거 같다. 그리고 난 역시 메탈리카같은 느낌이 좋아. 그런 느낌으로 연주하는 네가 좋고.. 그래서 요즘엔 안 좋다. ㅋㅋㅋ
2기 엔젤하트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많이 반갑네요 ㅎㅎ
지금도 꾸준히 세라밴드로 활동하시는 모습 멋집니다!
그리고 엔젤하트 포스팅 하려고 하는데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이 글을 링크해도 괜찮을까요?
물론 좋았습니다. 활동 중지한게 정말 아쉽습니다..
올해 중3인 학생입니다, 일본 비졀 좋아하다 어쩌어쩌해서 엔젤하트 알게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_^ 일본사람만 보다 한국분이 하시는걸 보니까
솔직히 '신선하다'라는 느낌이 과반수에요 , 여튼 저기 기사에 막 쇼킹! 이렇게
써있고 한데 저는 용기있게 비주얼밴드로 나서신 점에 의의를 두고싶어요
아직 안지도 얼마안됬고 , 연륜이 굉장히 쩌시는듯한 위엣분들이 계시니
저는 이만 줄이고 물러가겠습니다 , 좋은 글 잘 읽엇어요 히히
형 엔젤하트때 동영상이랑, 클럽에서 텔레케스터부시던 동영상 찾았다
맬주소 내폰으로 남겨줘 보내줄께 ㅋㅋ
어정쩡하고 일본이라기엔 80년대 말리스 분위기인데 어딘가
구리고 그래서 애매하고 아무튼 그래서 그런듯